투자 광풍 풍자한 코인이 투기 상징 된 사연

[암호화폐 바로알기] 농담에서 투기까지, DOGE의 기묘한 여정

 

  • 암호화폐 시장 풍자하려 만든 DOGE

  • 유행하는 ‘밈’ 통해 빠르게 확산

  • 커뮤니티의 기부 등으로 명성 얻었으나

  • 일론 머스크 관심 받으며 투기 수단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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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코인의 홈페이지 첫 화면에는 도지코인의 모델이 된 시바견 ‘카보스’의 그림이 있다. 도지코인 홈페이지 캡처, Gettyimage

 

2010년대 암호화폐 시장은 뜨거웠다. 비트코인이 보여준 ‘탈중앙화 금융’이라는 혁신적 시도가 전 세계를 달궜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호화폐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는 투자자는 많지 않았다. 암호화폐의 모체가 되는 블록체인 기술이 난해한 데다가 투기 광풍이 얽혔기 때문이다. 바로 이 틈에 2013년 ‘도지코인(DOGE)’이 등장했다. 이들은 블록체인 시장에 진지하게 도전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암호화폐 투자 광풍을 풍자하려고 만든 농담에서 비롯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도지코인은 자신이 처음에 비틀고자 했던 ‘투기 열풍’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며, 암호화폐 역사상 가장 역설적인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밈으로 만든 코인, 도지의 성공

2013년 12월 IBM 출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빌리 마커스와 어도비 마케터이던 잭슨 팔머(Jackson Palmer)는 IT기술을 활용한 장난을 기획했다. 아무런 기능이 없는 암호화폐를 내놓아 암호화폐 투자 광풍을 풍자하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풍자가 목적인 만큼 이름이 중요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이 필요했다. 약간의 장난기가 녹아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마커스는 처음에는 닌텐도의 인기 게임 시리즈 ‘동물의 숲’에 등장하는 화폐 ‘벨’을 모티프로 한 암호화폐를 구상했으나 팔머가 당시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밈(meme)’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자 방향을 바꿨다. 밈은 온라인상에서 유행하는 사진이나 짧은 동영상 등의 콘텐츠를 말한다. 마커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암호화폐 라이트코인(Litecoin)의 코드를 복제해 암호화폐를 만들고 ‘도지코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기술혁신이나 금융시스템 재편이 아닌, 재미와 가벼움을 앞세운 디지털화폐로 암호화폐 시장의 비이성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도지코인의 이름이 된 밈 ‘도지’는 2010년 2월 일본의 유치원 교사 사토 아코쓰가 자신이 기르는 시바견 ‘카보스’의 사진을 올리며 시작됐다. 카보스가 두 앞발을 앞으로 모으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은 미국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크게 유행했다. 미국인들은 이 개의 이름인 카보스 대신의 ‘도지(Doge)’라 불렀다. 한국에서 멍멍이를 ‘멍뭉이’ 등으로 귀엽게 고쳐 부르는 것처럼 의도적 오타인 셈이다. 

 

2013년, 미국의 밈 전문 사이트 ‘노 유어 밈(Know Your Meme)’은 도지를 그해 최고의 밈으로 선정했다. 이는 도지코인의 출시 시점과 절묘하게 맞물렸다. 밈이 더 알려지며 도지코인은 큰 인기를 얻었다.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도 도지코인이 유행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당시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다른 암호화폐를 이해하려면 복잡한 백서를 읽고 블록체인 기술을 공부해야 했지만, 도지코인은 그저 인터넷 유머 코드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기술적 장벽을 문화적 친숙함으로 바꾼 이 전략은 암호화폐를 단순한 기술 제품이 아니라 문화상품으로 만들었고, 다른 암호화폐는 얻지 못한 대중적 파급력을 초기에 확보하게 했다.

비트코인이 거대한 금융 혁명을 꿈꿨던 것과 달리, 도지코인의 초기 사용처는 소박했다. 주로 레딧이나 X(옛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사용자들이 재미있는 콘텐츠나 유용한 정보를 올린 창작자에게 감사의 의미로 ‘팁’ 형태로 도지코인을 냈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는 희소성 원칙을 강조한 것과 정반대로 도지코인은 무제한 발행 정책을 채택했다. 이는 장기적인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신뢰를 약화시켰지만 장점도 있었다. 개당 가격을 극도로 낮게 만들어 신규 투자자들이 부담 없이 진입할 수 있는 ‘저위험 고수익’ 도박판의 입장권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밈 기반 로고와 무제한 발행이라는 풍자적 장치들이 훗날 도지코인을 투기 열풍의 중심으로 밀어 넣는 핵심 동력이 된 셈이다.

 

도지코인, 커뮤니티 코인에서 문화 아이콘으로

도지코인은 암호화폐 세계에서 독특한 정체성을 쌓아 올렸다. 그것은 바로 커뮤니티의 자발적 참여와 관대함을 기반으로 한 ‘선한 영향력’이었다. 도지코인 커뮤니티의 선행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건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이었다.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이 극적으로 출전 자격을 얻었지만 경비 부족으로 출전이 불투명해지자 도지코인 커뮤니티가 나섰다. 레딧을 중심으로 모인 도지코인 사용자들은 자발적으로 모금을 벌였고, 단 이틀 만에 당시 시세로 3만 달러가 넘는 도지코인을 모아 팀에 전달했다. 이 사건은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인터넷 밈에서 시작된 장난 화폐가 현실 세계의 꿈을 이루어냈다’는 따뜻한 이미지를 도지코인에 새겼다.

같은 해, 도지코인 커뮤니티는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미국 유명 자동차 레이스 ‘나스카(NASCAR)’의 드라이버 조시 와이즈(Josh Wise)를 후원하기 위해 6780만 도지코인, 당시 약 5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모금했다. 와이즈의 경주용 자동차에는 거대한 시바견 그림과 도지코인 로고가 새겨졌다. 디지털 세계의 밈이 미국 주류 스포츠 무대에 당당히 등장하는 상징적 장면이 연출됐다. 이는 단순한 후원을 넘어선, 매우 효과적인 게릴라 마케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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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이 극적으로 소치 동계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었지만 경비 부족으로 출전이 불투명해지자 도지코인 커뮤니티가 모금을 벌여 이들의 경비를 마련해 줬다. AFP

 

도지코인 커뮤니티의 선행은 국경을 초월했다. 자선단체 ‘채리티 워터(Charity Water)’와 협력해 ‘Doge4Water’ 캠페인을 시작, 아프리카 케냐 타나강 유역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우물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캠페인을 통해 4000만 도지코인이 모였으며, 이는 도지코인 같은 암호화폐가 단순한 장난거리를 넘어 실질적인 글로벌 사회 공헌 활동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러한 초기 활동은 도지코인의 미래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당시 대부분의 암호화폐가 기술적 우월성이나 금융혁신 같은 차가운 논리를 내세울 때, 도지코인은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의 꿈’ ‘케냐 아이들의 깨끗한 물’과 같은 따뜻하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쌓아 올렸다. 이는 ‘내재가치가 없다’는 비판을 방어하는 강력한 방패이자, 단순한 투자 수익을 넘어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고 싶게 만드는 강력한 유인이 됐다. 

 

도지코인 커뮤니티가 베푼 자선은 뚜렷한 리더가 없어도 온라인 집단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금을 모아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 선구적 실험이었다. 이렇게 축적된 긍정적 평판과 사회적 자본은 훗날 투기적 광풍 속에서도 도지코인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저력이 됐다.

도지코인의 역사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일론 머스크와 도지코인의 인연은 2019년 그가 X에서 도지코인을 “가장 좋아하는 암호화폐일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시작됐다. 처음엔 단순한 농담처럼 보였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도지코인에 관심을 보였다. 

머스크는 X에 ‘도지는 사람들의 암호화폐(the people’s crypto)’ ‘달을 향해 짖는 도지(Doge barking at the moon)’와 같은 내용을 잇달아 올리며 도지코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의 발언은 언론보도를 통해 확산됐고, 이는 개인투자자들의 대규모 매수세로 이어졌다. 도지코인 가격은 1센트(0.01달러)도 안 되던 수준에서 최고 70센트(0.7달러)까지 치솟으며 경이적 상승률을 기록했다.

 

‘도지 파더’ 일론 머스크의 한마디로 시작된 대투기 시대

2021년, 머스크가 미국 인기 코미디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SNL)’에 출연한다는 소식은 도지코인 투기 열풍의 정점을 예고했다. 많은 투자자가 그가 방송에서 도지코인을 홍보해 가격이 1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루머’에 베팅했다. 그러나 방송 중 머스크는 도지코인을 ‘사기’라고 농담처럼 언급했고,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는 순간 가격은 순식간에 폭락했다. 방송 전 개당 0.7달러였던 도지코인은 이 발언 직후 0.5달러 아래까지 곤두박질쳤다. 

머스크의 영향력은 단순한 농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테슬라 일부 상품 결제에 도지코인을 허용하며 실제 사용처를 만들어줬다. 2023년 X를 인수한 뒤에는 상징인 파랑새 로고를 잠시 시바견 이미지로 바꾸는 파격적 행보를 보였다. 이 사건만으로도 도지코인 가격은 출렁였고, 시장에서는 트위터가 도지코인을 공식 결제수단으로 도입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퍼졌다.

이처럼 도지코인의 가격 그래프는 기술적 발전이나 암호화폐 시장의 구조가 아니라 사실상 머스크의 활동 기록과 궤를 같이했다. 이는 암호화폐가 내세우는 핵심 가치인 ‘탈중앙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진다. 중앙 권력(정부·중앙은행)에서 벗어나려 만든 기술이 역설적으로 한 인플루언서라는 새로운 형태의 ‘중앙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모순이 드러난 것이다.

도지코인 창시자들은 이 과정을 보고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환멸을 드러낸다. 풍자로 출발했던 암호화폐가 통제 불가능한 투기 괴물로 변하는 양상을 지켜보며 현대 암호화폐 산업 전체를 향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됐다.

공동 창시자 중 한 명인 팔머는 암호화폐를 “본질적으로 우익적이고 초자본주의적인 기술”로 규정하며, 그 목적은 “조세 회피, 규제 약화, 인위적인 희소성 조성을 통해 지지자들의 부를 늘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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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4일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X(옛 트위터)에 올린 도지코인 관련 내용. X 캡처

 

그는 암호화폐가 내세우는 ‘탈중앙화’라는 구호가 사실상 위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부유한 인물들로 구성된 강력한 카르텔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며, 이들이 “재정적으로 궁핍하거나 순진한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벼락부자’라는 환상을 팔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팔머의 비판은 특히 도지코인을 자신의 놀잇감처럼 다룬 머스크에게 집중됐다. 그는 머스크를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자아도취적 사기꾼’”이라 부르며, 머스크가 도지코인 커뮤니티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고 비난했다. 

팔머와 마커스는 2021년 투기 광풍이 일기 훨씬 전 자신들이 보유한 도지코인을 헐값에 모두 처분했다. 마커스 역시 “우리 둘 다 암호화폐 시장의 부정적인 면을 봤다”며 팔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현대판 ‘프랑켄슈타인’과도 같다. 가볍고 유쾌하게 금융의 허영을 풍자하려던 창작물이 외부의 힘(머스크)에 의해 생명을 얻어 결국 탐욕과 투기의 화신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창시자들의 환멸은 암호화폐 산업을 넘어 현대 인터넷의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 전반에 대한 고발로 이어진다. 도지코인의 가치는 거의 전적으로 소셜미디어의 관심에 의해 움직인다. 팔머는 이 관심이 “인플루언서와 유료 미디어 네트워크에 의해 교묘히 조작돼 대중을 현혹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도지코인은 관심 경제가 금융시장에 직접 적용될 때 어떤 위험과 파괴력을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된 셈이다.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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